고향’을 노래했던 두 가수가 같은 날 미국에서 별세!
- 가수 송민도(100세), 성악가 박인수(85세) 별세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던 두 가수가 같은 날 미국에서 별세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들의 위로가 되었던 히트곡 ‘고향초’의 가수 송민도(100), 그리고 ‘향수(鄕愁)’를 불러 ‘국민 테너’로 불렸던 성악가 박인수(85) 전 서울대 교수가 나란히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눈을 감았다.
최초의 드라마 주제가 '청실홍실'의 가수, 송민도
1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1923년생인 송민도는 미국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3∼4일 전 건강이 위중하게 악화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진 뒤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안남도 삼화보통학교와 서울 이화고녀(현 이화여고)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고 만주 용정에서 유치원 보모 생활을 잠시 한 뒤 결혼 후 연길로 거처를 옮겼다. 1945년 광복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송민도는 1947년 24세의 나이에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했다. 아이를 둔 주부의 이례적인 도전이었는데, 전속가수 1기생으로 발탁돼 3개월간의 교육을 받은 뒤 데뷔곡 ‘고향초’를 냈다.
'고향초'는 이후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 박성서 평론가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송민도는 정작 '고향초'가 얼마나 히트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며 “3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남녀노소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겨웠다고 회고했다”고 전했다.
송민도는 서울 수복 이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위문공연 활동을 펼쳤고, 휴전 후인 1956년에는 가수 안다성과 함께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1호 ‘청실홍실’을 불렀다. 그는 ‘청실홍실’에 이어 대표곡인 ‘나 하나의 사랑’도 히트시켰다.
고인은 1960년대에도 ‘목숨을 걸어놓고’, ‘여옥의 노래’, ‘서울의 지붕 밑’, ‘하늘의 황금마차’, ‘카츄샤의 노래’ 등을 발표해 인기를 누렸다. 이후 1971년 미국으로 떠나 로스앤젤레스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했다.
크로스오버 명곡 ‘향수(鄕愁)'를 히트시킨 성악가, 박인수
국내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서며 가수 고(故)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鄕愁)’로 유명한 테너 박인수 전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38년 3남 2녀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유년 시절부터 신문 배달 등을 하며 고학한 끝에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했다.
4학년 때인 1962년 성악가로 데뷔한 뒤 1967년 국립오페라단의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무대 주역으로 발탁됐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원과 맨해튼 음악원 등에서 수학한 뒤 미국 캐나다 등에서 ‘라보엠’, ‘토스카’, ‘리골레토’ 등 다수의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한 바 있다.
1983년 서울대 성악과 교수로 부임한 뒤에는 클래식 음악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소신에 따라 대중적인 행보에 나서 ‘향수(鄕愁)’를 발표했고 이 노래가 큰 인기를 끌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구(詩句)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향수(鄕愁)’는 1989년 음반 발매 후 지금까지 130만장 이상이 팔린 스테디셀러로 성악가와 대중 가수가 함께한 크로스오버 대표 명곡으로 꼽힌다.
이 곡은 클래식과 가요 간의 장벽이 높았던 80년대 말 한국 음악계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고,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박인수는 당시 클래식계에서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2000년 전국에서 2000회 이상 공연했고,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주역만 100여 차례 맡았다. 1990년대 ‘열린 음악회’(KBS)에도 단골 출연해서 한국방송대상을 받는 등 클래식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데뷔 50주년이었던 2012년까지도 매년 50여 회씩 무대에 서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유족은 부인 안희복 전 한세대 교수, 아들 플루티스트 박상준씨가 있다.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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